햇빛 예쁜 가을날, 오늘은 너희 세대들 흉내 내는 기분으로 카페 창가에 앉아서 지금 이 일기를 쓰고 있어. 요새 젊은 친구들은 카페에서 많은 일들을 하잖아. 난 가끔 아줌마들과 카페에서 있는 힘껏 수다를 떨다가 문득 옆에서 열심히 모니터 들여다보며 열중하고 있는 너희 같은 친구들에겐 아줌마들 토크가 얼마나 시끄럽고 한심스러울까 좀 부끄럽기도 했어. 때로 좀 예민한 친구들은 거슬림의 표시로 곱지 않은 시선을 쏘아댄 적도 있고 말야. 그래서 언젠가는 나도 한번쯤 카페에서 혼자 뭔가 하는 척하는 멋을 부려보고 싶었거든. 그게 바로 오늘이야. 치열하게 젊음을 살아내는 너희들에게는 카페에서의 시간조차 일의 시간이 되는 게 기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런 빠득빠득한 일상이 나한테는 멋이 되는 기분이란다. 어쩌면 이런 바쁨을 흉내 내보는 즐거움은 그 젊음의 시간을 다 살아낸 나이가 주는 선물인 것 같아.
나이가 들어가면서 사회 속에 연결된 관계의 폭이 줄어들다 보니 메일함을 통한 소통도 점점 없어졌어. 여준이랑 이렇게 교환일기로 메일을 주고받기 전까지는 근 10여 년 동안 내게 메일함이란 잊힌 항목이었던 거 같아. 그래서 이번에 여준이가 보내준 교환일기는 읽혀야 할 주인에게 한 달 가까이나 외면당한 채 가둬져 버렸네. 지난번 내가 일기를 보낸 이후 여준이가 바로 책 출간 마무리 작업으로 너무 바쁜 데다, 계획했던 네덜란드 여행 준비까지 겹쳐 당연히 시어머니와 교환일기 주고받을 정신이 없겠구나 싶었지. 그런데 이렇게 갇혀 있던 메일을 읽으면서 ‘아! 여준이는 그럴 리가 없는 사람인데…’ 싶더라. 내가 보낸 일기를 읽고 한참이 지나도록 모른 척하고 여행을 떠날 수 있는 그런 친구가 아니란 걸 새삼 깨달았지 뭐니. 여준이 말마따나 아무리 버거워도 책임감을 달팽이 집처럼 지고 다니고, 내 감정이 뭉그러져도 다른 사람 배려에 대한 세심함을 숙명처럼 지키고 싶어 하는 K-장녀 대표 주자인 여준이인데 말이야.
우리는 <유브 갓 메일>의 니콜 키드먼과 톰 행크스에 열광하고 인터넷을 통한 사랑을 다룬 영화 <접속>에 가슴 저렸던 세대지. 손편지의 정성을 알면서도 익명의 대상과의 메일을 통한 짜릿한 소통이 사랑으로 완성되는 그 애틋한 마음까지 모두 공감되는 세대랄까. 그래서 이번엔 메일함을 열어본 김에 그간 지우지 않고 남겨뒀던 메일함 속 사연들을 오랫동안 하나하나 읽어보았어.
메일의 첫 시작은 내 나이 37세. 엄청난 컴퓨터 에러로 인류의 종말이 올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가득했던 밀레니엄, 2000년이었더라고. 처음 받은 메일은 학교 선생을 그만둔 지 7년이 지난 그해, 날 좋아했던 옛 제자가 남편의 회사까지 어렵게 전화해 기어이 나를 찾아내 보낸 메일이었어. 그 뒤로 몇 년은 메일의 즐거움에 취했던 것 같아. 집에서 얼굴 보고 얘기해도 될 남편과도 메일을 주고받았고, 연락의 시작이었던 제자를 통해 연결된 다른 제자들과도 열심히 메일을 주고받았더라.
또 그 무렵 뉴질랜드로 이민 가는 D의 고모와 함께 해외에 보냈던 어린 D와 Y( D 의 누 나 ) 의 메일도 많이 있었어. ‘엄마가 보고 싶다. 그립다. 너무너무 사랑한다. 얼마 전 다녀간 엄마의 빈 자리 때문에 혼자 울었다’ 등등 눈물 없이는 못 볼 사연들도 넘치더라고. 쭉 읽어보면서 내 젊은 시절, 어린 아내, 어린 엄마 시절을 회상하며 그 밤을 좀 설쳤었네….
오늘도 그 조그만 발로 ‘열쩡열쩡열쩡’을 고민해 가며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을 우리 여준이. 어린 시절, 어른스러울 필요 없다고, 넌 아직 어리니까 어린애 같아도 된다고 토닥여 주는 사람이 있었더라면 하고 바랐다는 얘기에 울컥했어. D는 부모가 영원히 부모로 남게 해주는 게 효도라며, 영원히 우리 앞에서는 어리광 부리는 자식으로 남겠다고 당당하게 외치곤 했는데. 이제 내 가족인 여준이도 내가 할 수 있는 한 기댈 수 있고 토닥여 줄 수 있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줄게.
1년 중 가장 화려하고 멋스러우면서도 또 그만큼 스러져 가는 모습에 쓸쓸하기도 한 가을날이네. 나는 그 화려함에 감동하면서도 그 쓸쓸함까지 감사히 받아들이는 나이를 지나고 있는 듯해. 늙어감이 참 편안하고 좋은 날들이다. 이 일기는 아마도 지금 유럽에 있는 여준이에게 가닿겠지? 20여 일 돌아본 유럽에서의 여준이는 어떤 추억들을 엮어올까? 다음번 교환일기엔 유럽에서의 시간들을 느낄 수 있으려나. 카페에 낮에 들어왔는데 밤이 되어버렸네. 즐거운 시간을 만끽하고, 안전히 돌아오길 바라.
- 덕분에 몇 시간 동안 카페에서 커리어우먼 놀이에 흠뻑 취해본 현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