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어머님께 교환일기를 보내요. 사실 지난 교환일기를 받고 너무 재밌어서 그 자리에서 여러 번 읽었어요. 카페에 나가 노트북을 연 채 일기를 쓰는 어머님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상상도 해보고, 뉴질랜드에서 D가 어머님께 보낸 메일엔 어떤 내용이 있을까 유추해 보기도 하며 재밌게 읽었답니다.
저는 여행할 때 책을 한 권씩 들고 다니는데요, 이번 유럽 여행의 책은 정세랑 작가의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수는 없어》였어요. 정세랑 작가는 소설 《보건교사 안은영》을 쓴 여성 작가인데요, 이번 책은 소설은 아니고 여행 에세이였답니다. 유쾌한 문체와 내용에 빠져 무척 즐겁게 여행 독서를 할 수 있었어요. 그중 제 눈이 멈추는 문장이 있었는데요, 작가의 이전 소설 《지구에서 한아뿐》에 썼던 헌사 문장으로, 작가의 부모님에게 쓴 글이었어요. “아무리 해도 로또가 되지 않는 건 이미 엄마 아빠 딸로 태어났기 때문일 거예요”*라는 문장이랍니다.
그 글을 읽고 정말 좋은 문장이라고 생각하며 어머님을 떠올렸어요. 아마 제가 아무리 해도 로또가 되지 않는 건 이미 어머님의 며느리가 되었기 때문일 거예요. 인생의 운을 한곳에 몰빵했으니, 더는 너무 큰 요행은 바라지 않아야겠어요.
어머님이 궁금해하시는 저와 D의 유럽 여행은, 약 한 달이 지난 지금 다시 돌이켜 보니 ‘진짜 다녀온 게 맞나?’ 할 정도로 꿈처럼 느껴져요. 그래도 그 시간들을 떠올려 보면 즐거웠던 감정과 여행 내내 설렜던 마음이 느껴지기도 해요. 여행을 떠나기 직전까지도, 이 바쁜 와중에 떠나는 게 맞나 고민이 많았지만 다녀오고 보니 두말할 것 없이 떠나는 게 맞았어요. 누가 봐도 떠나는 게 맞았는데 왜 그렇게 염려가 되고 걱정스러웠을까요. 그래서일까요, 요즘 저와 D는 우리가 ‘한다 vs 안 한다’의 선택지에서 점점 ‘안 한다’를 선택하게 되는 건 아닌지 이야기를 많이 나누어요. 나도 모르게 점점 지금의 상황에 안주하고, 새로운 도전을 하지 않게 되는 것 같더라고요.
앗, 지금 이 일기를 읽고 계신 어머님의 생각을 맞출 수 있을 거 같아요! ‘다른 사람들보다 제 마음대로 신나게 사는 것만 같은, 이제 막 서른이 넘은 너희가 그런 고민을 한다니, 의외인걸?’ 저의 예상, 적중하였나요? 그런데 요즘 정말 그런 거 같아요. D도 6년 전에 했던 카우치 서핑** 여행을 이젠 할 수 없을 것 같다고 하고, 저도 예전만큼 열정적으로 배움을 갈망하지 못하게 된 거 같아요. 점차 귀찮아지는 것도 많고, ‘굳이’ 안 해도 될 것이 많아지고요.
자연스럽게 ‘안 하는’ 선택으로 마음이 향하게 되는데, 그럴 때마다 나이가 더 들면 얼마나 많은 것들을 안 하게 될까 생각하게 돼요. 맛있는 것도 별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고, 새로운 곳에 가는 것도 설레지 않게 되고, 사람을 만나는 것도 굳이 필요 없는 일이 될 것만 같거든요. 그래서 D의 할머님이 외출을 예전만큼 안 하시는 것도, 저희 부모님이 새로운 식당에 큰 흥미를 못 느끼시는 것도 모두 이해가 되더랍니다. 사실 이건 잘못된 것이 아니고 그저 자연스러운 변화겠지만, 왠지 D와 저는 그 자연스러운 변화를 거부하고 싶은 마음도 큰 거 같아요.
얼마 전 저희가 콘서트에 함께 가자고 어머님께 제안했을 때, 어머님이 단숨에 오케이 하지 않으니 D는 다시 그 고민을 하더라고요. 어머님도 고민할 시간이 필요할 거라고, 주말에 움직이는 건 원래 귀찮은 거라고 D를 달래보았지만, D는 한동안 ‘엄마가 안 하는 게 많아질까 봐 걱정된다’며 속상해했답니다. 물론 어머님의 진짜 이유는 (비슷하지만 다른 이유인) 젊은 애들이 많은 곳에 가는 게 어색한 것이었지만요.
어머님은 어떠세요? 사실 어머님은 저보다 체력도 좋으시고, 여행도 자주 다니시고, 활발하게 지내시니 큰 걱정은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오히려 제가 어머님 나이가 되었을 때가 더 걱정일 만큼요. 사실 저는 어머님의 추진력을 알기에 크게 우려하진 않지만, 가능한 한 오랫동안 함께 세상을 즐겨보고 싶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저희도 더 가벼운 ‘Let’s Go!’의 마음을 가져야 할 거 같고요.
전 활기차고 재밌는 할머니가 되는 게 꿈이거든요. 제가 상상하는 할머니는 새로운 음식도 시도해 보고, 여행 계획에도 설렘을 느끼는 할머니라 이제 갓 서른을 넘은 지금부터 이러면 안 되는데 말예요. 저보다 더 먼저 이 세상을 살아가고 계신 어머님. 어떻게 하면 활기차고 재밌는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요?
아, 생각해 보니 그래도 저희가 ‘한다’를 한 가지는 하고 있네요. 이 교환일기 쓰기! 그래도 이렇게 즐거운 ‘하는’ 일이 있으니 좋습니다. 저도 이제 또 다른 ‘하는’ 일인, 저녁을 먹으러 가야겠어요. 어머님도 오늘은 안 하는 일보단 하는 일이 많으시길 바라요.
어머님 로또에 당첨된, 여준
* 정세랑, ≪지구에서 한아뿐≫, 난다, 2019.
** 여행자가 현지인의 집에서 무료로 숙박하면서 문화 교류를 나누는 방식의 공유 숙박.